무토 아키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토 아키라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1892년 구마모토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독일 무관, 육군 참모본부 근무 등을 거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난징 대학살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1944년 필리핀 제14방면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종전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수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수 -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쟁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루거우차오 사건 관련자 - 무타구치 렌야
일본 제국 육군 장군 무타구치 렌야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 노구교 사건과 임팔 작전 등 주요 사건에 관여했으며, 전후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의 군사적 능력과 작전 실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루거우차오 사건 관련자 - 이치키 기요나오
이치키 기요나오는 노구교 사건에 관여하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헨더슨 비행장 탈환을 시도하다 전사한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소심한 성격과 무리한 작전 감행으로 비판받았으며 그의 자결 여부는 논란이 있다. - 통제파 -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신, 참모총장,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 통제파 - 나가타 데쓰잔
나가타 데쓰잔은 일본 제국의 엘리트 육군 군인이자 군정 관료로서, 총력전 체제 구축을 주도하고 통제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일본 군국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와 만주사변 관련 논란 등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무토 아키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무토 아키라 (武藤 章) |
출생 | 1892년 12월 15일 |
출생지 | 하쿠스이 (현재의 미나미아소, 구마모토) |
사망 | 1948년 12월 23일 |
사망 장소 | 스가모 형무소, 도쿄, 일본 점령기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
군종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3년–1945년 |
최종 계급 | 육군 중장 |
주요 지휘 | 근위 사단 |
참전 |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재판 정보 | |
죄목 |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
형벌 | 사형 |
상태 | 사형 집행 |
사망 원인 | 교수형 |
재판 | 극동 국제 군사 재판 |
일본어 정보 | |
일본어 이름 | 무토 아키라 (武藤 章) |
묘소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무토 아키라는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5기를 졸업하고, 1920년 육군대학교 제32기를 졸업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독일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다. 귀국 후에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행정 및 참모 직책을 역임했다.
1935년 참모본부 전략 기획 참모였으며,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당시 관동군 군사 정보 부서장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중일 전쟁으로 확대시킨 배후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2]
이후 일본 중지나 방면군 부참모장으로 승진, 여러 작전에 참여했으며 난징 대학살 당시 최악의 만행을 주도한 혐의를 받았다. 1939년 일본으로 소환되어 소장으로 진급, 일본 육군성 군사부에서 근무했다.
2. 1. 출생과 성장
1892년 12월 15일, 구마모토현 가미마시키군 시라스이촌 (현 기쿠요정)에서 아버지 사다하루, 어머니 카노 사이에서 4남매 중 차남(형 1명, 누나 2명)으로 태어났다. 무토 가문은 대대로 번의를 지낸 사족 가문으로, 지주였다.[6]제제이코 중학교,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학교를 거쳐, 1913년 육군사관학교 (25기)를 졸업했다. 동기로는 도미나가 쿄지, 사토 유키노리, 야마우치 마사후미, 다나카 신이치, 야마자키 야스요 등이 있다.
1913년 6월, 견습사관으로 오이타의 보병 제72연대에 배속되었고, 12월에는 보병 소위로 승진했다.[6]
1917년 육군대학교에 입교했으며,[7] 1920년에는 육군대학교 (32기)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은사 군도를 받았다. 동기로는 도미나가 노부마사, 아오키 시게노부, 사카이 야스시, 나카무라 마사오, 사카이 나오지, 니시무라 타쿠마, 하시모토 킨고로 등이 있다. 졸업 후에는 보병 제72연대로 복귀했다.
1921년 육군사관학교 전술학부에 배속되었고,[8] 1922년 3월에는 당시 육군 차관이었던 오노 사네노부 중장의 장녀 하츠코와 결혼했다.[8]
2. 2. 군사 교육
구마모토현립 제제이코 중학교,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학교를 거쳐 1913년 육군사관학교 (25기)를 졸업했다.[6] 도미나가 쿄지, 다나카 신이치 등이 동기이다. 1917년 육군대학교에 입교하여,[7] 1920년 육군대학교 (32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은사 군도를 받았다.[7] 도미나가 노부마사, 니시무라 타쿠마, 하시모토 킨고로 등이 동기이다.
2. 3. 초기 군 복무
1913년 견습사관으로 오이타의 보병 제72연대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보병 소위로 승진했다.[6] 1917년 육군대학교에 입교했다.[7] 1920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제72연대로 복귀했다. 1921년 육군사관학교 전술학부에 배속되었다.[8]2. 4. 결혼
1922년 3월, 당시 육군 차관이었던 오노 사네노부 중장의 장녀 하츠코와 결혼했다.[8]3. 교육총감부 및 참모본부 근무
무토 아키라는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5기를 졸업하고 1920년 육군대학교 제32기를 졸업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독일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다.[1]
1935년 참모본부 전략 기획 참모였으며,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당시 관동군의 군사 정보 부서장이었다. 그는 이 사건의 배후 계획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이는 중일 전쟁을 촉발했다.[1][2] 일본 중지나 방면군의 부참모장으로 승진하여 분쟁 초기 여러 작전에 참여했고, 난징 대학살의 최악의 만행을 주도한 혐의를 받았다.[1] 1939년 일본으로 소환되어 소장으로 진급, 일본 육군성 군사부에서 근무했다.
1936년 12월 내몽골 분리 독립 공작("내몽골 공작")에 종사했다.[23] 다나카 류키치 중좌가 신경쇠약으로 대응이 어려워지자 무토가 대신하게 되었다.[23] 1936년 11월부터 12월 초, 이시하라 간지가 만주·화북을 시찰하던 중 수이위안 사건이 발생, 이시하라 간지는 관동군 수뇌와 회담을 갖고 무토 등 관동군이 추진하던 내몽골 공작에 대해 중앙의 통제를 따르도록 설득했다. 이때 무토는 만주 사변 당시 이시하라 간지의 행동을 본받아 내몽골에서 실행하고 있다고 반론했다.[24][25]
같은 해 11월, 더왕의 내몽골군에 의한 화북 수이위안 성 침공 작전이 실패하고, 내몽골군 내 반란으로 일본인 특무 기관원들이 살해되었다. 무토는 관동군 제2과장(정보 담당)으로서 현지에서 사태 수습에 나섰으며, "결국 나는 다나카의 혀놀림에 놀아난 셈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정당 정치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군이 대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과도기적 편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19][25][26]
3. 1. 교육총감부 근무 (1922-1933)
1922년(다이쇼 11년) 교육총감부에 부임하였고, 같은 해 8월 대위로 승진했다.[8] 1923년(다이쇼 12년) 10월, 제1차 세계 대전 연구를 위해 독일로 갔다.[9]1926년(다이쇼 15년) 1월, 무토의 희망에 따라 미국을 시찰하고 같은 해 4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교육총감부에 부임하여 조전, 교범 편찬에 종사했다.[10] 1928년(쇼와 3년) 겨울, 이질을 앓았다. 3월에 퇴원했지만, 이후 당뇨병이 발병하여 잠시 휴가를 받았다.[11] 같은 해 8월, 소령으로 승진했다.[11]
1929년(쇼와 4년) 당뇨병이 호전되지 않아 대대장 임명을 희망하지 않았다. 12월, 육군대학교 전공 학생이 되어 주로 클라우제비츠와 손자의 비교 연구를 수행했다.[12]
3. 2. 참모본부 근무 (1930-1934)
무토 아키라는 1930년 11월 참모본부 제2부 구미과에서 주로 독일 관계 조사를 수행했다.[13] 1931년 8월에는 참모본부 제1부 병참반으로 이동하여, 교육총감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병참 강요 개편에 참여하고 만주 사변의 보급 업무를 담당했다.[14] 1932년 3월에는 참모본부 제2부 종합반으로 이동했고, 같은 해 8월 중좌로 승진했다.[14] 1933년 3월, 제2부장 나가타 데쓰잔의 명령으로 중지·남지 방면을 시찰했다.[15] 같은 해 11월에는 국제 연맹 탈퇴와 관련된 정보 수집을 위해 참모총장의 명령으로 구미를 시찰하고 이듬해 1월 귀국하여, 시찰 결과를 천황에게 보고했다.[16]3. 3. 보병 제1연대 근무 (1934-1935)
1934년 3월,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연대 부속 중좌로서 교육 주임을 맡았다.[23]4. 육군성 군무과 및 관동군 근무
무토는 1935년 관동군 특무부대에 배속되었다. 1936년에는 이시와라 간지가 만주국을 세운 것을 모방하여 내몽고에서 뎀충동그룹(더왕)을 옹립, 몽고군정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푸쭤이가 이끄는 국민당군에 저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의 사건확대 만류에 대해 "각하께서 (만주사변 때) 하신 대로 저는 할 뿐입니다"라고 반론했다는 일화가 있으나, 이는 이마무라 히토시의 회상이며, 이시하라 본인은 무토를 발탁하기도 했기에 다른 사람의 발언이라는 설도 있다.
1937년 관동군 참모부 제3과장이 되어 작전, 병참, 조직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당시 관동군 군사 정보 부서장으로서, 중일 전쟁을 촉발한 이 사건의 배후 계획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2]
4. 1. 육군성 군사과 근무 (1935-1936)
1935년 3월, 육군성 군사과로 이동하여 군사과와 군무과 업무를 수행했다.[18] 나가타 데쓰잔 정보부장 직속 종합반장으로, 통제파였던 니시우라 스스무는 무토를 "나가타 제2부장의 칼"이라고 평가했다.[19]1935년 8월 12일, 상관 나가타 데쓰잔이 아이자와 사건으로 살해당했다.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이 발생했다. 무토는 반란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의 사상을 부정했고, 나가타 데쓰잔(통제파)의 부하였기 때문에 2차적 말살자 명단에 올랐다고 한다.[20]
2·26 사건 이후 히로타 고키 내각의 조각 인사에 있어서, 군 내부에서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추천하는 움직임에 대해, 무토는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을 육군대신으로 옹립하고,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 대리로 히로타의 조각 본부에 들어가 육군의 의향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21] 무토는 당시 육군 내에 군 내각을 기대하는 열기가 상당했고, 그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서였다고 회상한다.[22]
4. 2. 관동군 참모 제2과장 (1936-1937)
1936년 6월, 관동군 참모 제2과장으로 이동하여 주둔지인 만주 관련 자료 정리를 수행했다.[23] 1936년 8월에는 대좌로 승진했다.1936년 12월, 내몽골의 분리 독립 공작(소위 "내몽골 공작")에 종사했다.[23] 처음에는 다나카 류키치 중좌가 대응했지만, 신경쇠약에 걸려 무토가 대신 대응하게 되었다.[23]
1936년 11월부터 12월 초,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와 화북을 시찰했다. 마침 수이위안 사건 당시, 이시하라 간지는 신징에서 관동군 수뇌와 회담을 갖고 무토 등 관동군이 추진하던 내몽골 공작에 대해 중앙의 통제를 따르도록 설득했다. 이때 무토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놀랐습니다. 저는 당신이 만주 사변에서 대활약하셨을 때 이 자리에 계신 이마무라 [관동군 참모] 부장과 함께 참모본부 작전과에 근무하며 당신의 행동을 자주 보았고, 매우 감명받았습니다. 그 당신의 행동을 본받아 그대로 내몽골에서 실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론했다. 젊은 참모들은 함께 웃었다고 한다.[24][25]
1936년 11월, 더왕의 내몽골군에 의한 화북 수이위안 성 침공 작전은 실패했다. 내몽골군 내의 반란으로 상급 사관을 포함한 29명의 일본인 특무 기관원들이 살해되었다. 사건 후, 무토는 관동군 제2과장(정보 담당)으로서 현지에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 때 수행했던 마쓰이 타다오 덕화 특무 기관 보좌관에게, 내몽골군의 취약한 실태를 알고 무토는 "결국 나는 다나카의 혀놀림에 놀아난 셈인가"라고 중얼거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19]
"정당 정치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군이 대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과도기적 편법이다. ... 이 과도기적 시대에 일본이 국제적 위기에 몰리는 것은 일본의 불행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운명이다."[25][26]
5.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무토 아키라는 구마모토현 하쿠스이 출신으로,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5기를 졸업했다. 1920년에는 육군대학교 제32기를 졸업하고,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독일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다. 귀국 후에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1935년 참모본부 전략 기획 참모였던 무토는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당시 관동군의 군사 정보 부서장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일으켜 중일 전쟁을 촉발시킨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1][2]
이후 일본 중지나 방면군 부참모장으로 승진하여 난징 대학살의 잔혹 행위를 주도한 혐의를 받았다. 1939년 일본으로 소환되어 소장으로 진급, 일본 육군성 군사부에서 근무했다.
태평양 전쟁 직전 중장으로 진급한 무토는 진주만 공격 당시 군사부 국장이었다. 1942년 4월 싱가포르에서 제2 근위사단 지휘를 맡았다. 1944년 6월부터 수마트라에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같은 해 10월 필리핀으로 전출되어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 휘하 제14방면군 참모장이 되었다.[3] 그는 필리핀 민간인과 포로 등에 대한 학살, 고문 등 잔혹 행위를 하고 게릴라 토벌을 명령한 혐의를 받았다.[4]
5. 1. 참모본부 작전과장 (1937)
1937년 3월, 이시하라 간지의 희망으로 무토 아키라는 참모본부 제1부 작전 제3과장으로 발탁되었다.[33]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무토는 다나카 신이치와 함께 대중국 강경 정책에 따른 사단 파견 실시를 주장하며, 불확대 방침을 주장하던 이시하라 간지와 대립했다.[31][28]무토는 다나카 신이치에게 전화를 걸어 "응, 다나카인가, 재미있어졌네, 응, 매우 재밌어, 크게 해야 해. 제대로 해보자"라고 과원들이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32] 또한, 다나카에 따르면, 무토는 "이시하라 부장의 생각은 고양이 눈처럼 변해서 전혀 파악할 수 없다", "부장처럼 꿈같은 생각을 해서는 시국이 더욱 깊어질 뿐이다. 나는 현실적으로 당면한 사태를 처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9]
이후 이시하라는 무토를 "면종복배자"라고 지목하며, 무토를 제3과장이 아닌 제2과장으로 해야 했다고 반성했다.[33] 무토는 스스로 "나는 상관인 선생님을 내쫓았다"라고 말했고,[19] 중일 전쟁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역시 이시하라 씨가 말한 대로였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34]
5. 2. 중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 (1937-1938)
1937년 8월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무토 아키라는 중지나방면군 부참모장으로 참전하여 각종 작전을 입안하는 공을 세웠다.[36] 상하이 부근의 중국군을 정면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무토는 항저우만에 상륙하여 중국군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건의했고, 이 건의는 채택되었다.[36]1937년 10월, 무토는 항저우만 상륙 작전을 위해 중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36] 카사하라 토쿠시는 무토가 난징 공략에 적극적이었으며, 현지 사령관이 군 중앙을 무시하고 난징 공략으로 향하도록 도발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28]
1937년 12월, 일본군은 난징 전투를 벌여 난징을 점령했다.[37] 무토는 부참모장으로서 난징 작전을 지휘했고, 마쓰이 이와네에 뒤이어 난징에 입성했다. 이후 일본군은 항저우를 공략하고, 1938년에는 쉬저우를 점령했다.[37]
무토는 장제스를 상대로 대중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노에 내각의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에 반대했다.[38]
5. 3. 북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 (1938-1939)
1938년 7월, 무토 아키라는 한커우 공략 전에 북지나 방면군 참모 부장으로 전임되어 베이징에 부임하여 화북 지역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당시 방면군 사령관은 테라우치 히사이지 대장이었고, 참모장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었다.[1][2][3][4][5]1938년 12월, 제1차 고노에 내각이 흥아원 설치를 발표하자, 무토는 "갑작스러운 발표이며, 일본 영토가 아닌 중국에 일본 행정 기관을 설치하는 것은 위헌이고, 군정은 군 사령관의 권한이므로 통수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1939년 6월, 무토는 공산군과 게릴라의 저항에 대응하여 톈진의 영국 및 프랑스 조계 주변을 봉쇄했다. 또한, 영일 교섭에 현지 군 대표로 참가했으나, 도쿄 교섭 도중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5. 4. 육군성 군무국장 (1939-1942)
1939년 3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9월 육군성 군무국장이 되었다.[42]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의 신체제 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다.[42]
일소 중립 조약에 대해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에 소련을 더한 추축에 의해 미국의 참전을 저지하고 중지 사변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한 기획으로서 대성공이다"라고 진심으로 기뻐했다.[43]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의 대미 교섭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그의 대미 교섭 태도와 의견 변화를 매우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다.[44] 대미 교섭 중 외무성의 업무 처리가 허술함을 느껴 놀라는 일이 많았다.[45]
1941년 9월경, 육군에서 가장 대미 교섭에 열심이어서 극우 일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며, 헌병의 호위를 받게 되었다.[46]
1941년 10월 12일에 열린 오기소 회담 내용을 전해 듣고, 도요다 데이지로 외상이 고노에 수상에게 중화민국 철병 문제가 해결되면 미일 교섭이 성립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미국의 주장하는 무조건 철병으로는 또 분쟁이 일어날 것이니, 그 방법에 대해 더 잘 생각해야 하며, 너무나 부주의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이카와 고시로 해군대신이 고노에 수상에게 대영미 전쟁 결정을 고노에 수상에게 일임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대영미 전쟁은 해군이 주역이 되므로 해군이 할 수 없다고 하면 육군도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수상에게 일임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47]
고노에 내각 말기에 대미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1941년 10월 16일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내각을 내던지고 18일에 총사직하였다. 같은 날 도조 내각이 성립되었고, 조각에 즈음하여 천황으로부터 개전을 용인하는 제국 국책 수행 요령 백지 환원의 어지가 발해지고, 도조 히데키 수상도 자세를 대미 개전 회피로 고쳤다.
1941년 10월 하순,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11월 1일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제시한 을안에 스기야마 겐 참모총장과 쓰카다 오사무 참모차장은 반대했지만, 무토는 두 안을 모두 동의하도록 설득했고 결국 두 사람도 동의했다. 이 일로 참모차장 이하의 반감을 샀다고 한다.[48]
1941년 11월 26일에 제시된 헐 노트를 보고, 이제 개전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고,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개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스스로 말했다.[49]
1942년 대동아 건설 심의회 간사가 되었다.[50] 개전 후에는 전쟁의 조기 종결을 주장하며, 도조나 스즈키 데이이치, 호시노 나오키 등과 대립했다.
1942년 3월, 남방 지역 (사이공, 방콕, 랑군, 싱가포르, 팔렘방, 바타비아, 마닐라 등)을 시찰하고 4월에 귀국했다.[51]
5. 5. 근위사단장 (1942-1944)
1942년 4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군무국장 명의로 전면적인 정보 제공을 명령했었다는 사실이 조르게 사건 발각 등으로 인해 밝혀지면서 면직되었다.[52] 근위사단장으로서 수마트라 섬의 수비를 맡게 되었다. 둘리틀 공습의 결과로 해임되었다고 기재된 문헌도 있다.사단장 전임으로 처음 군대 지휘관을 경험하게 된 무토는, 군무국장의 업무는 불쾌한 일이 많았기에, 일선으로 가는 것이 기뻤다고 회상했다.[53] 현지 군은 이미 전쟁에서 이긴 것과 마찬가지라 믿고 승리감에 취해 있었는데, 무토는 이에 놀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비를 충실히 하도록 지시했고, 이는 현장의 당혹감을 샀다고 회상했다.[54]
1943년 6월, 수마트라 섬메단에서 작전 중, 해당 사단은 근위 제2사단으로 개편되었다.[55]
사이판・팔라우가 미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무토는 부관에게 "전쟁은 졌다. 그러나 우리의 수마트라는 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56]
5. 6. 제14방면군 참모장 (1944-1945)
1944년 10월,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희망에 따라 제14방면군 참모장으로 취임했다.[56] 루손 섬 방어를 위해 제14방면군 사령부가 있는 마닐라 근교의 포트 매킨리로 이동했지만, 작전 준비가 미비한 필리핀에 가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과 같다고 회상했다.[56]미군이 레이테 섬에 상륙을 시작했을 때, 무토는 필리핀이 처음이라 레이테 섬의 위치조차 몰랐다. 전임 참모 사쿠마 료조는 병으로 인해 야마시타 대장은 참모 없이 시찰해야 했고, 새로 부임한 참모들은 필리핀 상황에 어두워 작전 준비가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고 한다.[57]
타이완 해전의 해군 대전과 오보를 대본영이 오인하여 레이테 섬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 레이테 섬 방어 명령을 내렸다. 야마시타와 무토 등은 급히 레이테 섬 방어에 나섰다.
레이테 섬 전투가 고전하자 무토는 남방군 총참모장을 방문, 해군 항공군 결전 실패를 인식하고 작전 재고를 진언했다. 그는 남방총군과 대본영의 작전 지도가 동맥경화 같으며 많은 생명이 헛되이 잃어가고 있다고 극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58]
1944년 12월, 루손 섬 작전 계획을 명령받았다.[59] 루손 섬 브로크 산 안쪽 아신 강 상류 유역에 사령부를 옮겨 항전하다 종전을 맞았다.[60] 야마시타와 할복을 제안했지만 설득당해 현지에서 항복했다.
1945년 9월 3일, 바기오에서 야마시타, 오카와우치, 아리마와 함께 항복 문서 조인식에 임했다.[61]
6. 전후 처리와 죽음
일본의 항복 이후, 무토는 미국 점령 당국에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중국과 필리핀에서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48년 12월 23일 교수형으로 사형되었다.[5]
6. 1.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도쿄 재판)
마닐라 군사 재판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 체포 기소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왔다.[77]도쿄 재판에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될 당시 육군 군무국장을 맡았던 시절의 개전 책임 및 필리핀, 수마트라에서의 일본군의 학대 및 학살 사건의 책임만을 유죄로 인정받았으며, 다른 시기의 죄는 당시 그러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징 대학살의 책임을 포함하여 무죄가 되었다. 학대 및 학살 사건의 책임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도쿄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군인 중, 중장 계급이었던 것은 무토뿐이다.
도쿄 재판에서의 사형은 실제로는 11명의 재판관에 의한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영미법에서는 보호 책임자에 의한 유기 치사 등은 고살의 일종으로 간주되며, 특히 이 시대는 아직 영국 및 많은 영연방 자치령 제국에서 고살·살인은 예외 없이 사형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거기에서 온 재판관이 많았던 도쿄 재판은, 학살 사건이나 포로 학대사건으로 재판받는 무토에게는 마닐라에서의 재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불리했다. 그러나 무토의 사형 이유는 검찰 측의 숨겨둔 증인으로 법정을 놀라게 한 다나카 류키치 전 육군 소장의 "군 중추에서 권력을 잡고, 대미 개전을 강행했다"는 증언에 의한 것이라는 설,[78] 또한 개전 당시의 도조 히데키의 아첨꾼과 같은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 등, 일본에서는 당시 영국법의 통념을 알지 못하고 주장하는 이설도 많다. 도조 히데키는 판결 후, 무토에게 "휩쓸려서 안타깝다. 설마 너를 사형시킬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63]。무토 본인도 자신에게 사형 판결이 나온 것은 이상하며, 자신은 그토록 미·일 개전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64]。
무토와 다나카 류키치는 서로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품고 있었으며, 무토의 도쿄 재판에서의 기소는 다나카의 조셉 키넌 주석 검찰관에게의 증언이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무토는 다나카가 군부 내의 움직임을 법정에서 폭로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증언을 한 것에 대해, 사사카와 료이치에게 "만약 내가 교수형을 당한다면, 다나카의 몸에 씌여 미쳐 죽게 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나카는 원래 양극성 장애가 있었고, 친족 중에는 자살로 보이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많았으며, 다나카 자신도 심인성 이유로 몇 번이나 입퇴원 및 자살 미수를 일으켰다[65]。하지만, 무토의 처형 후 "무토의 망령이 나타난다"고 다나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인간[66]도 있어, 다나카의 자살 미수의 원인을 무토와의 악연에 결부시키는 시각도 있다.
6. 2. 처형
무토 아키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 학대 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77]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77] 향년 57세 (만 56세)였다.무토 아키라가 사형 판결을 받은 주된 이유는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다나카 류키치는 무토 아키라가 군 중추에서 권력을 잡고 대미 개전을 강행하였다고 증언했다.[78]
도조 히데키는 무토 아키라가 처형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63] 무토 아키라와 다나카 류키치는 서로 혐오하는 사이였으며, 무토 아키라는 사사카와 료이치에게 다나카에게 복수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78]
무토 아키라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사세구(辭世句, 죽음에 임하여 남긴 시)를 남겼다.
- "서리 내린 밤, 결연히 떠나는 문턱이여"
- "지는 단풍, 바람에 흩날리는 행로여"
또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서쪽 어전에 급한 부름, 육지는 멀고 배는 약하니, 어쩔 수 없이 사공님, 한밤중에라도 저쪽 언덕까지 부탁드립니다. 서쪽 전하, 마음 좋은 분, 진수성찬 많이 내려주시겠지. 돌아가면 마음대로 혼자 건너, 술 안주 챙겨, 잠들게나."
1960년에는 순국칠사묘에, 1978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6. 3. 사후
무토 아키라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중국과 필리핀에서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 혐의로 1948년 12월 23일 교수형으로 사형되었다.[5] 이후 1960년 순국칠사묘,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7. 평가
무토 아키라는 근위 사단장 부임 시 부관 이나가키 타다히로 중위에게 오바타 노부요시 참모장이 "무토 중장은 육군에게 더없이 소중한 인재이니 어떤 전황에서도 절대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각오하고 보필하도록 해라. 그리고 또 하나. 무토 각하는 육군 제일의 수재인 동시에 까다로운 분이다. 각하의 잔소리의 방파제가 되어 적절하게 참모부에 연락해주면 참모들이 도움이 될 테니, 잘 해 주게"라고 명령했다.[67] 이 발언에서 "무토는 육군의 중진으로 결코 죽게 해서는 안 되는 존재", "육군 제일의 수재", "육군에서도 까다로운 타입(매우 성실하고 유능한 군인이며, 그 때문에 부하들에게 잔소리가 많았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던 탓인지, 부하뿐만 아니라 이시하라 간지 등 상관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등, 오만불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낮아 부하들로부터 "무토가 아니라 무덕"이라고 불렸다.
"무토가 아니라 무덕"이라고 불린 이유로는, 제2차 및 제3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서기관장을 맡았던 토미타 겐지가 무토와 격론을 벌이면서도 항상 기분 좋게 협상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등, 무토는 상대의 의견이 자신과 달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한편 안 된다면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료도 있다.
8. 가족 관계
아내는 무토(구 성: 오노) 하츠코(1903년 출생)이며, 슬하에 자녀가 없어 하츠코의 조카를 양자로 삼았다. 하츠코의 아버지는 육군 대장 오노 사네노부이다.
9. 기타
- 통제파에 속했기 때문에 황도파에 속하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와는 사상이 달랐지만,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 오자키 호츠미와 친했다.[68]
- 제4항공군 사령관이었던 토미나가 쿄지와는 육군 유년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루손 섬 전투에서 마닐라 방어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의 뜻에 반하여, 마닐라에서 철수를 거부하던 토미나가 쿄지를 설득했다. 그 때 "연료와 탄약이 부족한데 항공군 사령부가 (필리핀에) 고착되어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속히 타이완으로 이동하여 작전의 자유를 얻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타이완으로의 철수를 권유하여, 토미나가가 작전 도중에 무단으로 필리핀을 철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무토는 무단 철수로 비판받던 토미나가를 "그들의 험담 중 하나로, 제4항공군 사령부가 타이완으로 이동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옹호했다.[69]
참조
[1]
뉴스
WAR RESPONSIBILITY—delving into the past (2)/Konoe, Hirota sat on their hands
http://www.yomiuri.c[...]
Yomiuri Shimbun
2006-08-13
[2]
뉴스
Yasukuni gripes still dog nation
http://search.japant[...]
The Japan Times
2006-08-12
[3]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4]
웹사이트
Trial Watch: Akira Muto
http://www.trial-ch.[...]
2007-10-01
[5]
서적
Annotated Leading Cases of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s
https://books.google[...]
Intersentia nv
2007-10-01
[6]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7]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8]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9]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0]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1]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2]
서적
軍務局長 武藤章回想録
芙蓉書房
1981
[13]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4]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5]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6]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7]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8]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19]
서적
昭和陸軍全史2
(株)講談社
2014-11-20
[20]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21]
서적
石原莞爾
潮書房光人社
2015-10-10
[22]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23]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24]
서적
私記・一軍人六十年の哀歓
芙蓉書房刊
[25]
서적
武藤章:昭和陸軍最後の戦略家
文藝春秋
[26]
서적
現代史資料·第八巻
みすず書房
[27]
서적
石原莞爾
潮書房光人社
2015-10-10
[28]
서적
南京事件(笠原十九司 著書)
岩波新書
[29]
서적
石原莞爾
潮書房光人社
2015-10-10
[30]
서적
石原莞爾
潮書房光人社
2015-10-10
[31]
서적
石原莞爾
潮書房光人社
2015-10-10
[32]
서적
陸軍省軍務局
[33]
서적
石原莞爾
潮書房光人社
2015-10-15
[34]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35]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36]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37]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38]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39]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0]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1]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2]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3]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4]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5]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6]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7]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8]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49]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0]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1]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2]
문서
Jurius Mader・Dr.-Sorge Report
1984
[53]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4]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5]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6]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7]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8]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59]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60]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61]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62]
서적
日本憲兵正史
全国憲友会連合会本部
1976-08-15
[63]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64]
서적
破綻 陸軍省軍務局と日米開戦
講談社
1978-06
[65]
서적
大東亜戦史 第10巻
富士書苑
[66]
뉴스
2017-03-27
[67]
서적
武藤中将、副官の思い出
巨杉会(『巨杉会会報』第7号)
[68]
서적
大東亜戦争はルーズベルトの錯覚から始まった
[69]
서적
『比島から巣鴨へ 日本軍部の歩んだ道と一軍人の運命』
中公文庫
2008-12-20
[70]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949-01-31
[71]
간행물
法廷証第118号: [武藤章關スル人事局履歴書]
NDLDC
[72]
간행물
官報
官報
1939-11-17
[73]
간행물
官報
NDLDC
1943-01-07
[74]
간행물
官報
NDLDC
1942-02-12
[75]
간행물
官報
NDLDC
1941-12-15
[76]
백과사전
무토 아키라 [武藤 章] - 사형에 처해진 미일전쟁 반대론자
네이버 지식백과
[77]
백과사전
무토 아키라 [武藤 章] - 사형에 처해진 미일전쟁 반대론자
네이버 지식백과
[78]
서적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
20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